[아라토도]for my lady
2016. 3. 13
토도른 교류회에 배포했던 아라토도 연성을 공개합니다.
“아가씨, 이제 치장하셔야 할 시간이어요.”
귀를 두드리는 나긋한 시녀의 부름에, 토도는 눈을 뜨고 젖혔던 고개를 천천히 바로 세웠다. 몸을 일으키자 곱다란 살결 위로 넘실대던 온수가 장미꽃잎과 같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하고 서 있던 여인이 얼른 다가와 폭신한 수건으로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여타의 귀족 영애들과는 달리 풍만한 가슴 따위는 없는 딱딱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고용인에게도 아가씨라 불리고는 있으나 그 정체는 사내라. 하여 저의 목욕시중을 들 수 있는 이는 설령 어떤 고문과 협박을 당하더라도 단 한마디도, 한 글자조차도 흘리지 않아야 하기에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요양 차 잠시 저택을 벗어나있는 시녀장을 제외하면 이 전속시녀가 토도의 목욕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토도는 그녀를 믿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불안요소를 될 수 있는 만큼 제거하고 곁에 두긴 하였으나, 어쨌든 그녀는 토도의 좁고도 까다로운 안에 당당히 들어온 존재였고, 그럴 자격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토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인이 들고 온 물건을 보는 순간 아름답던 미소는 처참히 구겨졌다.
“하…….”
“매번 반응이 격심하시네요.”
“…내가 안 그러게 생겼니.”
흉물. 저것은 해로운, 해롭고 해로운 흉물이다! 마찬가지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두통에 토도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껏 수백 번은 입어왔을 텐데 볼 때마다 긴장되고 끔찍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 흉악한 철제 갑옷을 또 둘러 허리를 조여 대야 한다니. 빌어먹을 예법, 빌어먹을 드레스!
그러나 애석하게도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 시대, 이 나라 귀족 여인들의 치장은 매우 중요했고 또 그만큼 공을 들여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져야 했다. 보다 아름답고, 보다 매력적이며, 보다 완벽한 사교계의 여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그 와중에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이라도 만들어보겠다고,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 몸을 조이지 않는 형태의 드레스를 유행시키기까지 한 토도였으나 오늘 참가할 곳은 격식과 전통으로는 첫째로 꼽는 황실의 무도회. 이토록 공식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신체에 고통을 주면서라도 세대를 아울러 용인될 수 있는 ‘귀족적인’ 차림이 필요했다.
비록 실제로 귀족 여인인 것은 아니나, 어렸을 때부터 체득해온 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토도는 심호흡을 했다. 마치 전장에라도 나가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시녀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심하게는 안 조일 테니 걱정 마세요. 제가 한 두 번 해보나요?”
“…제발 부탁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르셋으로 죽고 싶진 않아. 간절한 청원에 그녀 또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숨을 들이켜고, 하나, 둘, 셋!
“으윽!”
“아직이어요., 아가씨. 한 번 더!”
“싫어어!!”
***
“…표정이 왜 그래?”
“…몰라요. 묻지 마세요. 아니, 그냥 닥쳐요.”
“어째, 우리 공녀님 말투가 점점 더 험해지네. 나랑 놀아서 그런가?”
그래도 괜찮겠어? 느물거리며 킬킬대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어서, 토도는 기품 따위 집어치우고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아라키타의 얼굴을 부채로 꾹 밀어냈다. 거의 경장(輕裝) 수준의 철제 뼈대들을 풍성한 드레스 아래 한가득 두르고 있어, 함부로 큰 동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토도는 한숨을 내쉬며 아라키타를 흘겨보았다. 재차 억울하게도, 배색이며 디자인을 제 것과 맞춘 연미복이 훌륭하게 잘 어울렸다. 역시 기사의 몸이랄지. 벌어진 어깨며 몸의 선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균형이 잡혀있다. 귀찮다고, 거추장스럽다고 징징대던 이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한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아라키타는 기대 이상으로 제법 옷걸이가 되는 인물이었던지라, 평민 출신의 ‘개‘라는 오명이 무색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이렇게 파트너로 같이 나설 때마다 토도는 내심 흡족해했다. …물론, 오늘도 그래야 하겠건만.
흡사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빛깔의 남색을 베이스로 가슴팍엔 섬세한 은빛 자수가 자리한 고급스런 테일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그의 복장도 칼같이 선을 잡아 우아하고 격식 있는 복장이긴 했으나 제가 억지로 몸을 우겨넣은 드레스에 비하면, 안 입은 것처럼 편할 것이 분명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늘 그랬듯 덤덤하게 제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나서, 이내 토도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눈앞에 익숙한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뭐야. 언제까지 쳐다보기만 할 거야?”
“아라키타-, 경. 에스코트는 조금 있다 해주셔도 괜찮은데요.”
“내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거니까 상관없어.”
듣는 이가 황당해질 만큼 당당한 대꾸에 토도는 가느다란 당혹감을 얼른 삼켰다. 무뚝뚝하고, 자못 퉁명스럽기까지 한 어투와 달리 고개 들어 마주한 아라키타의 눈은 단물이 뚝뚝 덜어질 것처럼 부드러웠다. 평소엔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공언할 수 있을 정도로 기사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량 기사의 표본인 주제에. 어쩔 때는 깍듯하고, 탄성이 나올 만치 정중하고, 심지어는 상냥하기까지 하다.
싫진 않다. 절대 싫은 건 아닌데. 좋긴 하지만…어쩌면, 조금은 괴롭다.
그러한 감정의 단 한 자락도 내비치지 않은 채 토도는 다만 곱게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참을성이 없네요, 아라키타 경은. 너무하셔라.”
“그게 뭐 어때서. 약혼자의 손을 부끄럽게 하는 레이디야말로 너무한 거 아닌가?”
안 잡을 거야? 집요하게, 어쩌면 애원하듯 종용하는 눈빛에 토도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부채를 쥐지 않은 팔을 올려, 살포시 아라키타의 손 위에 손가락 끝을 얹었다. 꽃잎이 하늘하늘 수면 위에 내려앉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다음 순간 그와 대비되게 무인의 손이 흉포하다 싶을 정도로 다급히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오랜 수련과 싸움으로 자리한 굳은살과 뼈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의 감촉이 선명하게 닿았다. 지독히도 상처 입어왔으나, 그렇기에 더욱 든든한, 사내지만 동시에 레이디인 토도 진파치만을 위한 기사님의 손.
사랑스러운 사람.
토도는 결국 활짝 웃어버리고 말았다. 평소 밖에서 보이던 잔잔하고 옅은 미소가 아닌, 꽃망울이 터지듯 해맑은 웃음이었다.
아, 젠장할. 아라키타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토도의 손을 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이힐을 신었지만 그래도 저보다 약간은 낮은 토도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밖에서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왜요, 내가 웃겠다는데.”
“같잖은 버러지들이 자꾸 꼬이잖아. 진즉 약혼도 맺은 사람한테.”
아라키타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토도의 웃음에 순간 넋이 나갔으면서도, 예민한 그의 청각은 곳곳에서 헉 하고 숨을 삼키던 소리들을 날카롭게 잡아챘던 것이다. 직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려주자 황급히 시선들을 내리고 거리를 좀 더 벌려 떨어지긴 하였으나 불쾌함은 가시질 않았다.
저로 인해 더욱 달고 귀여워지는 것은 좋지만 밖에서는 계속 도도하고, 고고한 절벽 위의 꽃으로 군림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설마 그 토도 공녀가 저리 사랑스러운 모습도 있을 줄은 몰랐다’며, 대화라도 한 번 나눠볼 수 있을까싶어 낑낑대며 나대지 않을 것 아닌가. -어디 어중이떠중이들이 감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지.
“저런,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요? 그 정도도 못 거를 줄 알고요? 난 아라키타 경이 아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요.”
“거 참…. 네네, 그러시겠지요.”
“흠. 제법 귀여운 질투를 하시네요, 우리 약혼자님은.”
“질투라니, 누가…!!”
거기까지 외치던 아라키타는 서둘러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나지. 이게 질투고 투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부정하고 싶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런 아라키타의 속내쯤은 훤히 읽고 있다는 듯 토도가 눈을 휘었다.
“뭐 저야 좋긴 하지만, 일단은 나중으로 미뤄주시겠어요? 이제 우리가 입장할 차례니까요.”
퍼뜩 정신을 차리니, 과연 그랬다. 그들은 이미 무도회가 열리는 홀의 입구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난데없는 사랑 놀음이며 아라키타의 험악한 기세에 차마 둘의 입장을 고하지 못하고 눈을 데로록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시종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 미친, 쪽팔리게. 뜨끈하게 귀를 달구며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아라키타는 뒤늦게 큼큼 헛기침을 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국의 꽃이 직접 말을 걸어주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시종이 연신 신경 쓰지 마시라, 저는 괜찮단 말을 반복했다. 귀족들의 호명이라는 중한 임무를 맡은 황궁의 시종만 아니었더라면 금방이라도 붕붕 손사래를 칠 것만 같은 열렬함이었다.
하기야, 토도를 앞에 두고 저런 반응이 아닌 이를 찾기가 더 어렵긴 했다. 그래, 알고는 있다만!
고해달라는 토도의 말에 목을 가다듬은 그가, 아라키타에게도 묘한 시선을 한 번 던지더니-나중에 어떻게든 실수인 척 뒤통수를 후려쳐 주리라 아라키타는 굳게 다짐했다-명단을 높이 들고 크게 호명했다.
“황궁 제 5기사단장 아라키타 야스토모 경과, 토도 공작가의 진파치 공녀 드십니다!”
무도회장 내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일순간, 옅게 깔려있던 재잘거림이 사라지고 삽시간에 침묵이 회장을 덮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울 법한 노골적인 소강상태에도 불구하고 토도는 아라키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척척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 그는 늘 그랬다. 아라키타와 토도가 아무 관련 없는 타인으로 철저히 분리된 각자의 세계에 서 있었을 때에도, 두 사람이 약혼이라는 관계로 묶여 함께 모습을 드러내던 첫 공식석상에서도, 토도가 가지고 있던 후광을 아라키타가 나눠받고 아라키타가 받던 멸시를 토도 또한 겪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때에조차 토도는 초연하기만 했다. 도리어 어떻게든 그들을 깎아내리려 들던 자들을 무뢰배로 몰아 매장시켜버리고, 뒤에서 들려오던 수근거림까지 깔끔하게 없애버렸다. 오만하리만치 당당한 자신의 태도만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존경스러웠다. 입 밖으로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라키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협박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니 그를 좋게 볼 수 있을 리 만무했으나, 조금씩 공범자로서 가까워지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다시 보게 된 토도는 아라키타가 증오해 마지않던 흔한 귀족 나부랭이와는 달랐다.
원치 않는 거짓을 두르고, 기만으로 장식하며 살아왔다지만 토도는 저에게 주어진 그 빌어먹을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을지언정 그것이 동반하는 독에는 물들지 않았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고귀함에 어울리게, 당연하게 고개를 치켜들었을 뿐.
강한 사람이다.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 거짓에 점철되었지만 그 자신만은 진실한, 하여 가련하고도 꼿꼿한 뒷모습이 무섭도록 매력적인. 그리고 제 앞에서만큼은 기꺼이 모든 가면을 집어던지고 솔직해지는, 기사이며 사내인 아라키타만을 위한 웃음을 보여주는 저만의 레이디.
아라키타는 신음 같은 웃음을 낮게 토해냈다. 배부른 짐승이 기분 좋게 목을 울리듯이 나지막한 것이었다. 처음에 덫을 놓은 것은 토도였으니 옴짝달싹 못하고 잡힌 것은 아라키타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제 의지로 기꺼이 줄에 매여 토도의 곁에 있었다. 토도의 유일한 연인은 아라키타였고, 내막이야 어쨌든 그의 합법적인 남편이 되어 해로할 사람도 아라키타 뿐이었다. 이 이상, 대체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곧 몇몇 쌍들이 삼삼오오 홀의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이미 제국의 태양 황제폐하께서는 상투적이고도 위엄 있는 인사를 던져놓고 자리를 뜬 후였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와중에도 기계적으로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린 제 자신에게 심심한 칭찬을 던지며, 아라키타는 토도를 돌아보았다.
“의례적인 댄스 타임이군. 자, 레이디. 한 곡 어떠십니까?”
“어머나. 고귀한 공녀에게 춤을 청하는 기사님이라기 보단 저잣거리에서 추파를 던지는 탕아 같군요.”
“뭘 새삼스럽게. 춤을 출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칭찬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박자감각 없이 뻣뻣한 기사를 간신히 춤 상대 구실하게끔 만들어 놓은 건 나고요. 뭐, 좋아요. 이제 리드 정도는 할 줄 알겠죠? 숙녀의 발을 밟는 신사 따위 확 걷어 차버릴 지도 몰라요.”
“…유념해두지.”
낮은 목소리로 진심 섞인 농을 주고받으며, 아라키타와 토도는 손을 맞잡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마주섰다. 이내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제일 많이 춰봐서 귀에 익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고 가벼운 왈츠 곡이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라키타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토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내 기사님. 시작해볼까요?”
“그러지요.”
저를 놀리는 것이 분명한 말에 불퉁하니 대꾸하며, 아라키타는 토도의 허리를 감쌌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크리놀린 드레스를 소화하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조여서인지, 부드러운 살이 아닌 딱딱한 금속 뼈대가 만져지고 안 그래도 얄따란 허리가 한 층 더 가늘어진 느낌이 선연해 아라키타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냐며 올려다보는 토도의 눈망울에 금방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대긴 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예쁘니까 좋긴 하지만, 그거랑 이건 별개다.
하지만 제가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을 알고 있는 아라키타는 모른 척 토도의 손을 잡고 몸에 익은 스텝을 밟았다.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춤이라기 보단 검술에 가까운 노련한 동작에, 토도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빨라지는 선율에 맞춰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아라키타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많이 발전했네. 이래저래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약혼자님인지라 토도는 뿌듯하게 웃었다.
첫 곡인지라 그리 길지 않던 왈츠가 끝나고, 두 사람은 자리를 벗어나 음식 테이블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아라키타가 건네주는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며 토도는 눈을 가늘게 떠 무도회장을 슥 훑었다. 역시나 황실의 무도회. 웬만한 거물들이 죄다 모여 적당한 농담과 웃음이나 귀족답지 않은 경박함, 혹은 칼 같은 싸늘함으로 무장하고 그처럼 이 지저분한 세계를 관조하고 있었다.
-익숙하고도 구역질나는, 아름다운 내 세계의 풍경.
자, 그럼. 토도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아라키타에게 눈짓했다. 싫어 죽겠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군말 없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불세출의 공녀는 우아하게 드레스자락을 잡았다.
이제 우리 기사님이 치를 떠는 정치질을 하러 가볼까.
진짜 무도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코르셋 같은 거, 안 불편하냐?”
오늘의 임무를 끝낸 후 부자연스러운 갑옷을 벗어내는 토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질문을 던진 아라키타는, 곧 놀라울 정도로 언짢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토도의 얼굴을 마주해야했다.
“궁금하면 네가 입어 봐. 내가 왜 굳이 엠파이어 드레스를 유행시켰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 음. 미안.”
조용하고도 서슬 퍼런 토도의 반문에-사실 아라키타로서는 ‘엠파이어 드레스’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도 가물가물했지만-주눅 들어 그는 깨갱, 꼬리를 말았다. 토도는 콧방귀를 뀌고는 나머지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버거운 교정 속옷들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마침내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토도는 크게 숨을 토했다. 아, 이제 좀 살겠네.
처음 뒷부분의 매듭을 끌러준 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아라키타는 슬쩍 자세를 도로 편하게 하며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절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귀족 여성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내온 이답게 희고 고운 피부. 그러나 속은 사내임을 얕보지 말라는 듯 곳곳에 잡힌 근육은 보기 좋게 늘씬하다. 거기다 뒷목부터 시작해, 곧은 등줄기를 타고 엉덩이의 곡선까지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라인에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선명한 이목구비와 속눈썹까지. 가히 완벽이라고 칭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전설 속의 존재인 엘프를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아, 그래. 굳이 코르셋 따위로 힘껏 허리를 조이고 크리놀린을 집어넣어 풍성한 치맛자락을 흔들지 않아도, 그의 몸은 단지 그 자체로도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어떤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이 아무리 숨을 참고 허리를 조이고 가슴을 부풀린다 한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토도의 나신처럼 저를 훌륭히 유혹할 수는 없으리라. 저 가냘프고도 꼿꼿한 허리만큼 흥분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 계집이든 사내든 그에게는 비할 수조차 없지. 아라키타는 비죽 웃으며 토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곱게 틀어 올렸던 머리타래가 길게 등을 덮어 내린 장면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라키타는 머리칼을 모아 한쪽으로 넘겨주며 토도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아까 홀짝여댔던 와인의 단내가 토도의 체향에 섞여 민감한 아라키타의 코를 자극했다.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 까슬한 혓바닥으로 훑어 내리자 타박이 들려왔다.
“참을성 좀 가져 봐.”
“싫은데.”
“우리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아무리 약혼자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좀 있으면 결혼할 거잖아.”
“핑계는. 지금 얘기잖아, 지금.”
피곤해 죽겠는데, 어쩜 한번을 조용히 넘어가는 적이 없을까. 그러나 토도는 짐짓 엄한 말투로 대꾸하면서도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의 살을 빨며 아프지 않게 이를 세우는 아라키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르는 개에게 하듯 귀 뒤쪽을 살살 긁어주자 그르륵, 만족스러운 목울음이 귀에 울렸다.
누구에게나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는 주제에, 오로지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머리를 부비며 뺨을 할짝거리는 귀여운 짐승이 내 것이다. 그것이 지극히 뿌듯하여 얕은 숨을 내쉬었다. 단단하게 등을 감싸고 팔 안에 가두는 온기는 처음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좁고, 확실하고, 폐쇄적이어야만 하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매 순간 절벽 끝을 걷듯 일상적인 위협 속에서 지내는 토도에게, 아라키타는 본디 그저 위험한 거래상대일 뿐이었다. 불가피한 최선의 수단이긴 했으나 선 밖의 타인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며,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는 있지만 언제 뒤를 찌르고 달아날지 몰라 경계를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그러한 위험은 토도 자신이 아라키타에게 접근하면서 협박이라는 수단을 취했기 때문에 더욱 가능성이 높았다.
실상, 그 과정은 토도로서도 입맛이 썼다. 인질로 삼았던 이들 중 아라키타가 후원하는 고아들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그랬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독을 먹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도록 치밀하게 꾸미고, 제가 그만큼 악독하고 가차 없는 자라는 것을 믿게 만들어 아라키타를 벼랑 끝까지 몰아간 것은 사실이었다. 다수의 피를 볼 각오도, 했었다.
…만약 아라키타가 끝끝내 그와의 거래를 거부했더라면, 실지로 토도는 아라키타에게 인질로 언급했던 이들을 죽였을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처절하고 선명하게. 하여 그가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도록.
다행히 아라키타가 바로 거래에 승낙했기 때문에 마음 깊이 안도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우스웠던가. 토도 자신이 이렇게나 이기적인 자라는 걸 재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수치스러웠던가.
결과적으로 토도가 걱정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비즈니스에 충실하게 좋은 계약 관계 정도만 되어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바와 달리 그들은 이름뿐인 약혼자 이상의 사이가 되어있었다.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제 인생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일이었다. 감히 욕심 내 본 적 없는, 꿈꿔 본 적조차 없었던.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손 안에 선명히 쥐어져있는.
…네가 나를 구해 살려냈음을 너는 모르리라.
“…내가 정말, 보는 눈 하나는 괜찮지.”
“뭐가?”
“으응,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계속 그렇게 안고 핥기만 할 거야? 어물쩍 넘어가려는 것을 아라키타가 재차 답을 요구하려는 차에, 토도가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아니, 그럴 리가. 이죽이듯 대꾸한 아라키타가 제 레이디를 훌쩍 안아 올렸다. 쪽.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댄 기사님이 그를 침대 위에 눕혀놓고 다시 콧잔등에 입술을 찍었다. 간지러워. 그래? 여기도? 아, 거기 진짜 안 돼! 간지럽다니까! 헤에, 그렇단 말이지. 어디, 여긴 어떤지 한 번 볼까. 꺄악, 변태. 장난스러운 대화에 온기를 넘은 열기가 서서히 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 열기는 제법 맘에 드는 것이었기에, 토도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라키타의 목을 끌어안았다.
***
정정하겠다. 맘에 들긴 개뿔이. 토도는 경박한 욕이 입 밖으로까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대신 뾰족한 눈매가 벌겋게 물들어 피로와 수치, 분노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가! 진짜 개도 아니면서 왜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지! 오기가 샘솟아 입술을 꾹 깨물었으나, 볼을 두드린 손가락이 유연하게 입술 새로 침범했다.
(...)
숨을 몰아쉬던 토도가 힘겹게 몸을 돌리더니, 달래듯 아라키타의 뺨을 어루만졌다.
줄게. 다 가져. 너도 내 거니까, 나를 줄게. 너한테만 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낮게 쉰 목소리로 돌아오는 허락의 말은, 눈물 나오도록 사랑스러웠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아라키타는 제 뺨을 감싼 손을 쥐어 손바닥깊이 입을 맞추더니, 사교계에서 인사하듯 토도의 손등에도 입을 맞췄다. 사뭇 경건하기까지 한 애정 어린 키스에 토도는 몰래 웃었다.
나의 기사님은, 내 사랑스런 개는 참으로 아무것도 몰랐다. 아라키타는 아무것도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쓸데없는 고민 따윈 접어도 좋았다. 네가 내게 무릎 꿇었던 순간부터, 너는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고 나는 오롯이 너만의 것이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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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잠든 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새까맣고 결 좋은, 기다란 머리카락은 그에게 잘 어울렸지만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언젠가 토도가 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린다면 한편으론 아쉽겠지만, 자신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리라.
늘씬하고 가느다란 허리도 그랬다. 분명 군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지만 거슬리는 것이었다. 여성들마저 과히 허리를 조이다 목숨을 잃는 것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흔해빠진 광경이었거늘, 하물며 사내인 그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부담이 될까. 오늘도 여러모로 혹사당했을 텐데, 제 욕심에 치우쳐 신나게도 괴롭혀버렸다. 뒤늦게 몰려오는 죄책감이 무거웠다.
제국의 꽃, 어여쁘고 우아한 레이디, 내로라하는 가문의 고귀한 공녀.
토도에게는 지겨울 정도로 당연한 찬양의 말이었으나, 또한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이기도 했다. 차기 후계자 선정에 알력다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니 뭐니 하는 가문의 사정으로 억지로 제 성별을 강탈당한 채로 살아 온 사람에게, 저것은 가련한 훈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키타는 여전히 이 계약관계에서 철저한 약자였다. 모든 사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실상 토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에게 지독한 자괴감을 주었다. 아라키타는 멋대로 토도를 옭아매는 옷을 벗겨버릴 수도 없고, 그가 짊어진 책무를 모두 내던지고 나와 도망치자는 헛소리 같은 것도 할 수 없다.
그게 명백한 현실이니까. 이 화려한 세계에선 제 한 몸만 가지로 바닥에서 구르고 살아남던 방식 그대로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것.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이럴 뿐이라는 것부터 이미 기사 실격일지도 모르지만.
나를 줄게. 나를 가져. 평생 너한테 잡혀줄게. 기사든 개든 아무래도 좋아. 나는 오로지 당신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너를 줘. 타인에게 신경 써주지 마. 나 외에 어떤 다른 개새끼도 발밑에 들이지 마. 이 목줄을 놓지 말아줘. ……나를, 버리지 마.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던 애원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아라키타는 토도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가여운 기사는 레이디와 달리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로, 눈부시고 가혹했던 무도회의 밤이 저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굉이입니다. 교류회 신난다! 야호! 먼저 교류회를 열어주신 주최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본 책은 이전 연성했던 평민 출신 기사 아라키타x여장 귀족 영애 토도로, 토도가 사정상 아라키타를 협박함에 따른 계약약혼을 하고 이런 저런 사건 뒤 사이가 좋아진 이후의 내용입니다. 나름 로판 같은 느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토도를 희롱하는 교양변태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놀아주시면 매우 좋아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goengyi0601
goengyi0601.tistory.com
2016. 3. 13. 토도른 교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