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연성/앙스타 17. 4. 2

[이즈레오]보답

역시, 지구가 많이 아픈 것이 분명하다. 아직 12월 초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한겨울 뺨칠 만큼 추웠다. 레오 자신이 더위보다 추위에 약한 타입이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역시 릿츠, 선견지명이 있는 똑똑한 내 기사님. 코타츠 안쪽에 있는 발가락을 꼼질거리고 제가 입고 있는 후드에 더욱 깊숙이 파묻히며, 레오는 더듬더듬 손을 놀렸다.

제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이러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 내 천재성은 손재주에는 없는 거야!!”

, 소리 지르며 손에 있던 것을 내던지려던 레오는, 다시 고이 쥘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초심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시간은 아무리 있어도 모자랐다.

끄응웃쮸우우…….”

그런 것치고는 진도가 너무 안 나가지만. , 깊다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손 안에 쥐어진 대바늘은 뭉툭함에도 불구하고 제 손은 이미 크고 작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손만 그렇다면 아무래도 좋으련만, 문제는 거기 걸린 목도리도 슬슬 얼룩이 지고 있다는 점이다. 뜨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조금이라도 잘 해보겠다고 조물딱거리다 보니 벌써 제 손때가 묻어버렸다. 조금 더 어두운 색으로 할 걸. 따뜻한 느낌을 내고 싶어 적당한 톤의 쥐색을 골랐던 저의 선택이 원망스러워졌다.

세나가 하는 건 쉬워보였는데.”

레오는 입을 비죽 내밀고도 어설프게나마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행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에 또랑또랑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중지되어야 했다. 코타츠 안에 묻혀있던 하체에 한기가 몰려드는 싫은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발딱 일어났다. 도도도 제 방으로 달려가 옷장 안쪽에 뜨다 만 목도리며 대바늘, 털실을 파묻어놓고 다시금 도도도 거실로 달려가 코타츠 위에 악보를 흩뜨려놓은 뒤 현관으로 향하는 일련의 행동은 놀라울 만큼 빨랐다. 벨을 누른 당사자가 위화감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웃쮸! 세나!”

안녕, 왕님. 추우니까 빨리 들여보내줘.”

왜 벌써부터 날씨가 이 모양인 거야. 진짜 짜증나. 평소처럼 툴툴 불만을 뱉으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세나 이즈미는 아이보리색의 폴라티를 입고 있었다. , 따뜻하게 챙겨 입고 다니는구나. 역시 세나. 프로 모델의 자세는 달랐다. 세나의 머리색보다 조금 더 짙은 빛의 목도리를 예쁘게 떠서 둘러주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는지. 현재의 진행상황을 보면 걱정이 태산이었다.

뭐야? 사람 앞에 두고 무슨 생각해?”

으응, 아냐! 얼른 들어와, 춥다며.”

그건 그렇지만. 그나저나 왕님이야말로, 아무리 집안이라지만 옷 얇지 않아? 추위도 잘 타면서 뭐야, 그거?”

그래서 코타츠 안에 들어가 있었어! 따끈따끈해.”

코타츠가 오히려 감기 걸리기 쉽거든? 옷 좀 갈아입지. 니트 없어?”

성큼, 망설임 없이 레오의 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평소라면 징징대며 뒤를 쫓아갔을 테지만, 오늘은 예외다. 아니, 당분간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

, 자자자잠깐 세나!! 입을게. , 내가 가서 갈아입고 올게!”

하아? 뭐야, 갑자기?”

그으, 방 더럽다고. 얼른 코타츠에 들어가 있어! 세나는 귀한 몸이니까, 왕의 명령!”

하아아아아? 방 더러운 게 뭐 하루 이틀이야?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세나의 등을 애써 밀었다.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억지이긴 했으나 지금 세나가 방에 들어가서 옷장을 열었다간, 들킬 위험이 컸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비밀로 해두고 싶으니까. 장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는 후닥닥 옷을 갈아입고 튀어나갔다.

무어라 잔소리를 해댔으면서, 저도 코타츠 안에 냉큼 들어가 발을 녹이고 있는 세나의 모습에 헤실헤실 웃으면서.

 

***

 

왕님이 수상하다. 세나 이즈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손에 크고 작은 상처 같은 것이 끊이질 않는데다 제가 찾아올 때마다 침실에는 절대 들여보내 주질 않는다. 가끔은 초인종이 울린 다음에도 금방 나오지 않기도 하고. 열쇠를 바꿨다며 복사해주겠다고 하더니 계속 잊어버렸다고 실실 웃고. 그래서 추궁해봤더니만.

왕님 요즘 이상한데? 왜 날 계속 피하는 것 같지?”

, 웃쮸?!”

나한테 뭐 잘못했어? 아님,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거지.”

, 아아아니! 내가 세나를 왜 피하겠어? 세나, 요즘 일 많아서 피곤하구나~ 왓하하!”

그러면서 등을 팡팡 두드리는 손속은 평소와 다름없이 매워서 눈썹이 절로 찡그려졌었지. 회상하던 세나는 레오의 그 반응으로 확신했다. 저를 피하고 있거나, 아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것치고는 의외로 저를 갈무리하는 것이 확실해서, 제 속내를 쉬이 보이지 않던 평소의 레오와는 확연히 달랐다. 무언가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세나는 학생시절과는 달리 꽤나 적극적으로, 왕이 숨기고 있는 것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레오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바람과도 같이 침실로 잠입하여 옷장을 뒤적인 것이 그 실천방안이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그건 귀여웠지…….”

세나 씨?”

, 아무것도 아닙니다.”

메이크업을 해주던 아티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에, 세나는 다시 얌전히 앉아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에도 자꾸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아서 꽤나 애를 먹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 왕님이 조그마한 손으로 꼬물거리며 목도리를 뜨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할 정도로 안쪽에 박혀 있던 박스 안에는 약간의 손때가 묻고, 보풀이 일어 누가 봐도 잘 떴다고는 할 수 없는 목도리며 털실, 대바늘이 소중히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저를 막으며 무언가를 감추려고 했던 행동. 날이 추워졌다 하면 학생 시절 제가 떠줬던 목도리를 동동 두르고 외출하는 레오의 모습 같은 것을 떠올려 보면 목적은 자명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제 얼굴도 순식간에 시뻘개져서, 레오가 나오기 전에 허둥지둥 갈무리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 그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모른 척 해줄까.

세나는 가볍게 눈을 감고 날짜를 셌다. 오늘은 1220. 크리스마스까지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입을 꾹 다물고 모른 척 즐겁게 기다려줄 수 있었다.

 

***

 

라고, 생각했는데.

세나, 메리크리스마스다!”

어째서 없는 걸까. 세나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구겨진 얼굴을 했다. 선물인지 새로운 일인지 모를 신곡을 받은 것은 물론 좋다. 레오가 저만을 위해서 작곡해준 것을 받는 일은 항상 기쁘니까. 보드랍고 깔끔한 디자인의 넥타이도 좋았다. 한참 고민한 듯 한데, 저를 위해 가게를 찾아다녔을 것을 생각하면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없다. 없다. 제가 기대하고 있던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나? 왜 그래? , 별로야?”

아아니, 좋지. 근데 왕님.”

찰나의 순간, 세나 이즈미는 고민했다. 아직 완성이 덜 됐나. 아니면 마음이 바뀌어서 그만 뒀나. 혹은, 사실 내 착각이었고 나한테 줄 물건이 아니었다든가. 꽤나 저답지 않은 가능성을 떠올린 것도 잠시였다. 세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뻔뻔하게 폭탄을 던졌다.

왕님, 내 목도리 떠줬잖아. 그건 왜 안 줘?”

효과는 굉장했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해진 레오는, 금붕어마냥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뻐끔뻐끔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발개진 뒤에야 나이츠의 왕은 시간차 폭탄처럼 터졌다.

, , 봤어?!?!!!?!!”

반응이 재미있을 만큼 격렬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을 놀릴만한 정신머리는 남아있지 않아서, 세나는 애써 조급함을 감추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수상쩍게 행동하니까, 모를 리가 없잖아.”

, 그으.”

그래서, 내 거 맞지? 왜 안 주는 건데?”

하지만…….”

꼼질꼼질, 손가락을 놀리는 모습이 평소의 폭군답지 않았으나 귀엽기 짝이 없었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고 딱딱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자, 기어들어갈 듯한 답변이 돌아왔다.

, 너무 엉망이고. 볼품없어서.”

그런 걸 세나한테 줄 수는 없잖아.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것이 숫제 울 것 같았다. 미완성작을 봤을 때부터, 아니 그걸 보지 않았더라도 진즉 알고 있는 바인데. 너는 왜 죄라도 지은 것 마냥 그렇게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나. 시선을 내리자 제대로 치료도 하지 않은 듯 얼룩덜룩한 작은 손이 걸렸다. 이렇게까지 해줬으면서, 무엇이 그렇게 미안한 것처럼.

제 입으로 떠들고 다녔던 것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왕이다.

세나는 고개 숙인 레오의 턱을 잡아 올리고 앞머리를 걷었다. 이마에 입을 맞춘 후 금세 발개진 눈가에 입술을 떨어트리자 깜박이는 녹안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세나?”

바보 아냐? 왕님이 손재주 없는 건 이미 잘 알고 있거든. 거기다 초심자면서, 설마 내가 해준 것만큼 잘 될 거라고 기대한 거?”

그건 아니지만!”

양심은 있는 왕의 소신발언이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그건 그렇고, 나는 얻을 건 얻어야겠다.

어쨌든 나 주려고 뜬 거잖아. 그렇지?”

. 하지만.”

그럼 그건 내 거야.”

?”

빨리 내놔. 내 목도리.”

그리고 이어지는 미소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기사의 모습에 레오는 입을 떡 벌렸다. 어째, 졸업한 뒤로 뻔뻔함이 배로 증가한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런데 그런 모습마저 예쁘다니 이건 반칙이다. 항상 느끼지만 반칙이 따로 없다. 결국 홀린 것처럼, 레오는 옷장 안쪽에 방치해뒀던 쥐색 목도리가 세나의 손에 들리는 것을-갈취 당했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엉망진창인 저의 작품이 세나의 어깨 위에 둘둘 둘려 자리 잡는 것까지.

저가 레오에게 떠줬던 것과는 천차만별로 다른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듯이 환히 웃었다.

목도리도 고마워, 왕님. 잘 쓸게. 엎드려 절 받기 같긴 하지만.”

…….”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저 모양 저 꼴인 목도리를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런데 주고 싶기도 했고. 싫은 것 같은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톱 모델에게 고작 저런 걸 줘도 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엉망진창인 목도리라도 제가 세나를 생각하며 뜬 것이 당사자에게 둘러져 있으니 흐뭇함이 샘솟기 시작했다.

히히. 결국 헤벌쭉 웃는 레오를 보던 세나는, 그 상태로 손을 뻗어 볼을 잡아당겼다.

으쮸으?!”

그래서? 떠준 건 고마운데 말야. 손은 왜 계속 이 모양 이 꼴이야?”

그게에.”

, 왕님 일이니까 안 봐도 뻔하지. 어차피 또 생길 텐데~하고 연고도 제대로 안 바르고 있었지? 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정곡이다. 민간인 사생활 보호가 이렇게 안 되어서야, 일본에서 안심하고 살 수가 없어! 속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며 레오가 시선을 회피하는 사이, 레오의 손을 잡고 이끈 세나는 자기 집인 것 마냥 척척 구급상자를 찾아왔다.

소파에 앉혀놓고 무릎을 꿇는 자세에 놀란 것도 잠시, 손가락 끝마다 입을 맞추는 기사가 너무나도 경건해서. 어리석은 발가숭이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숙여진 얼굴이, 얇은 입술이 손가락에 닿는 모습이, 그 끝에 느껴지는 온기가. 하나하나 저를 옭아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언젠가, 눈물을 삼키며 애써 외면하고 있던 마음을 날것으로 꺼내놓았던 그 때처럼. 먼 길을 돌아왔던 왕과 기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어느 늦은 저녁의 겨울. 여전히 어설프고 서투른 자들이 연인이 된 후 처음으로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의 일이었다.

 

***

 

그래서, 하필이면 피카츄 밴드입니까? 좀 깨는데요.”

? 난 좋은데! 웃쮸, 랑 비슷하고?”

왕님답다고 할지~.”

뭘 또 종알종알 말하고 있는 거야.”

, 연애담의 주인공 셋쨩이다.”

그거 짜증나거든? 무지하게 짜증나거든?”

그나저나 이즈미쨩이 지금 하고 있는 게 소문의 그 목도리인 모양이네? 귀여워라.”

확실히. 자유분방한 것이 Leader의 작품답네요.”

스쨩 많이 용감해졌네~”

세나아, 왔으면 얼른 안아줘. 나 추워.”

저기, 왕님. 방금 전까지 밖에 있다가 온 건 내 쪽이거든?”

결국 왕님 말대로 할 거면서 튕기는 것도 변함없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게 셋쨩이니까.”

……거기 시끄러워.”

, 평화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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