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연성/앙스타

[이즈ts레오]기사와 공주

1.

향부터 달콤한 연분홍빛 차가 귀여운 자기에 담기고, 달지 않은 과자들이 줄지어 접시를 장식했다. 보통은 쌉쌀한 차와 적당히 단맛이 나는 다과가 준비되고는 했으나, 차밭이 유명한 남계의 어느 영지에서 진상한 귀한 찻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제법 우아하고 귀여운 공주님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웬만한 탕아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막무가내에 괴짜인 레오라도, 고귀한 자로 태어나 예법교육에 절어 살았기에 티타임은 제법 중요하게 여겼다. 바쁜 스케줄과 쌓여가는 서류 사이에서 간신히 낼 수 있는 휴식시간이기에, 종종 시녀 복장을 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남장도 불사하며 궁을 탈출하기도 하는 레오였으나 정갈하게 차려진 티 테이블을 앞에 두면 나름대로 얌전해지곤 했다. 그것을 잘 아는 전속시종들은 업무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취향에 맞춰 다과를 들이는 것도 모자라 방심한 틈을 타 자체적으로 티타임을 마친 공주가 집무실을 탈주할까봐 감시인을 세우곤 했다.

오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세나 이즈미는 주군의 맞은편에 앉아 떨떠름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짧게 입술을 적시더니 인상을 구기며 내려놓았다.

"너무 달아. 이런 건 어떻게 먹는 거야?"

"올해 들어 처음으로 왕실에 진상된 차라고? 귀한 거니까 조금 더 들지 그래."

"사양."

두 손을 펼쳐 찻잔에서는 손을 뗀 세나가 무늬 없는 과자를 입에 넣고 오독오독 물었다. 다과는 썩 좋아하지 않지만 단맛이 없으니 그나마 좀 살 것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딱히 달디 단 것은 취향이 아니면서, 레오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차를 음미했다. 팔의 각도며 고요한 표정,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는 예법마저 완벽한 것이, 누가 보면 정말 교양 있는 레이디며 로열 프린세스라고 깜빡 속을 법한 광경이었다.

시간이 퍽 많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다른 차를 우려오라고 하기는 뭐해서, 텁텁한 입 안을 적시기 위해 결국 세나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제 취향은 아니었으나 잎사귀가 오밀조밀 앙증맞게 그려진 찻잔은 달콤한 차와 잘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세나, 할 말이 있는데."

부드러운 마들렌 하나를 고상하게, 그리고 흔적도 없이 해치운 레오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 세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가, 뭔데? 대꾸하며 찻잔을 입술에 댔다. 그 직후, 고귀한 공작가의 자제는 달짝지근한 찻물을 공주의 면전에 대고 뱉어버릴 뻔했다.

"나랑 결혼할래?"

"??!?!!!"

, 반사적으로 입을 가린 손이며 훌륭하게 몸에 밴 자제력에 감사하며, 세나는 간신히 입 안에 든 것을 삼켰다. 사례가 들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그의 등을 두드리는 레오의 얼굴에는 평온함을 넘어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오~ 그렇게 놀랄 얘기였어? 까딱하면 아주 얼굴에 뿜었겠다, 그치?"

"그게, 콜록, 누구 때문, 콜록."

"글쎄에~ 세나가 칠칠맞아서 아냐? 이런 사람을 기사며 보좌관이라고 곁에 두고 있다니 나도 참 마음이 넓어서 탈이야. 너무 무르면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없는데, 곤란하네."

주군이고 왕세녀고 뭐고 확 다 엎어버리면 안 되나? 불과 1분 전 나라의 왕세녀이며 자신의 주군이기도 한 이성 소꿉친구에게서 청혼을 받은 남자의 감상이었다.



2.

"이런, 죄송하지만 황자님의 구혼은 거절해야 할 것 같군요."

"생각보다 단호한 대답이시군요. 어째서인가요?"

"저는 왕위를 이을 자이니, 어찌 타국의 태자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태자가 되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요."

"만족하지도 못하실 분이 무슨 겸양을 떠십니까."

안 어울리니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화사한 이죽거림은 사교에 관해서도, 정치에 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던 공주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직설적이었다. 실제로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돌려 말하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뭐어, 저 황자의 곱상하고 정갈한 이목구비만큼은 제법 취향이었는데 말이야. 속으로 쩝, 입맛을 다신 레오는 속내와는 달리 예쁘게 웃었다.

"저희가 딱히 어울리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혼인을 한다 한들 각자가 바라는 것을 이뤄줄 수도 없을 테니 별 수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무엇을 짐작하고 계신지 모르겠으나,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전하와 혼인을 하고 싶다면 어떻습니까?"

레오는 고개를 들어 당돌한 대사를 뱉는 황자를 마주보았다. 날씨가 좋은 봄날의 오후, 구름 한 점 없는 부드러운 하늘을 그대로 녹여놓은 청안이 달게 아름다웠다. 조금은 탐이 나고, 아주 조금은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나 레오는 저것보다 더 짙고, 깨끗하고,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청명한 하늘을 알고 있었다. 눈이 아려 와도 자꾸만 보고픈 하늘을 품은 자를 이미 알았다.

"글쎄요. 설령 황자님이 제게 마음이 있으시다 하여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진작, 언제인지도 모를 시점부터

"저는 옛날부터, 제 것이라고 점찍어놓은 녀석이 있거든요."

나는 네 하늘에 빠져있었던 거야.

레오는 가까워지는 익숙한 푸른빛을 보며 웃었다.



3.

반지를, 바꿀 때가 됐나.

세나 이즈미는 슬쩍 제 왼손을 내려다보다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심장이 간질간질하기도 한 기분.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혼을 한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 사실 1년도 전부터 차근차근 결혼 준비를 해 오던 그가 아닌가. 늘 하던 대로, 레오의 보좌관으로서 업무를 하고 세력을 정리하는 것은 물론이요 예물이며 식에 대한 것들도 하나하나 마련해놓던 차였다. 국왕 전하는 레오에게 왕위를 선양할 예정인 바, 그 시기는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다음 봄이 적기였으니 이는 눈치가 있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로 표현하는 것만 남았는데.

, 짜증나!”

귀한 도련님답지 않은 언사를 하며 세나는 머리를 헤집었다. 놀이동무에서 진짜 친구로, 또 주군과 기사로, 또 연인으로, 그렇게 약혼자라는 이름까지 왔다. 그녀와의 관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이름을 더해가는 것에 익숙해질 법 한데도 결코 쉽지가 않았다.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차라리 서류에 산에 던져지거나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마물숲에 떨어지는 게 마음이 편할 지경이었다.

,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보류.

재차 한숨을 쉬며 세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4.

하얗고 선이 부드러운, 테두리에 금박의 장식을 둘러 우아하기 짝이 없는 고가의 찻잔을 내려놓으며 레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세나. 할 말이 있는데.”

수없이 겪은 상황에 대사인데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그는 세나? 하고 의아하게 그를 부르는 레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왜, 하고 대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나는 차를 머금고 있지 않았던 자신의 현명함에 감사했다.

여기로 이사 와. 세나한테 왕후궁을 줄게.”

곧 왕관을 쓸 자가 방긋 웃었다. 너무도 당당하고 우아한 미소에 세나는 잠깐 인상구기다가 입을 열었다.

싫어.”

효과는 굉장했다. 온몸에 두르고 있던 위엄과 당당함, 나아가 뻔뻔함을 죄다 집어던진 공주가 울상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 왜애애!! 세나는 내가 싫어?!”

잠깐 어이가 없어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자, 징징거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세나? 진짜로? 우리 약혼했는데! 약혼했다는 건 결혼을 약속했단 뜻인데! , 나 근데 지금 완전 상식적이었어. 그치.”

…….”

, 아니 이게 아니라! 세나아아아, 진짜 싫어? ? 진짜로 나 싫어?”

이제 레오는 숫제 티 테이블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격렬한 기세인데도 눈물방울이 맺히기 직전인 눈매며 일렁이는 초록빛이 예쁘다고 하면, 너는 뭐라고 할까.

시끄러워, 공주님. 매달리지 마. 누가 공주님이 싫대?”

……정말? 그럼 왜 싫은데?”

궁이 따로 있는 건 너무 멀어.”

멍청하게 입을 벌린 레오가, 귀 끝이 빨개져 시선을 피하는 세나를 보자마자 화사하게 웃었다. 세나아아아! , 잠깐, 으악!!

, 하늘빛의 드레스자락이 흩날렸다.



5.

그건 뭐야?”

, 세나. 이거 봐, 이번에 온 사절단이 폐하의 뜻이었다며 이걸 바치더라.”

…….”

세나는 인상을 구겼다. 제국의 영역 내 작은 섬에서만 재배한다는 귀한 꽃과, 그에 둘러싸인 장신구의 보석이 반짝거렸다. 정말 흠 없이 아름다워서 짜증이 일 지경이었다. 거기다 저 보석, 혼인예물로 자주 쓰인다는 종류 아닌가.

아무리 지금은 타국의 황제고 그녀의 정치적 파트너라지만, 어차피 차였던 남자다. 세나는 흥,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왕님 취향 아니잖아?”

뭐어, 내 취향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예쁘지 않아? 왜 그렇게들 눈에 불을 켜고 찾는지 알 것 같긴 해. 이렇게 예쁜걸. 꽃꽂이해서 집무실에 장식해둘까? 어떻게 생각해 세나?”

예쁜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누가 봐도 나 심기불편하다, 고 써 붙인 것만 같은 왕후의 얼굴에 레오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무리 의도한 것이었다지만, 레오는 더 연기할 마음도 접고 이젠 아예 턱까지 괴고 세나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응응, 역시 세나는 귀여워. 예뻐.”

너 지금 즐기지?”

그치마안, 세나 지금 얼굴 완전 예쁜걸!”

, 몸을 돌리려는 세나를 잡아 볼을 감싼 레오가 그의 이마며 콧등, 볼에 쪽쪽 베이비키스를 날렸다. 그리고는 입술까지 가볍게 맞대고는 방글 웃었다.

세나아, 알잖아. 내 남편이 최고야. 진짜 좋아해.”

……왕님 진짜 짜증나.”

, 나도 사랑해!!”

레오의 웃음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황자였던 황제와 짜고 그를 놀린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매번 이리 사랑스러운 반응을 보여주니, 어찌 놀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갑작스럽게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면서도, 짖궂은 왕은 꺄르륵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목을 끌어안았다.



.

레오: 세나! 세나 이거 봐! 이거랑 이거랑, 세나한테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이번에 살까 하는데 어때?

세나: (관련 서류를 보더니) 기각.

레오: ! 왜애! 88

세나: 예산이 과해. 왕님은 날 악부로 만들 셈이야?

레오: 세나가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사주고 싶은 건데! 내 사재로 살 건데!

세나: 그럼 보류.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 일단 오늘 올라온 서류 먼저~

레오: 88(집무실로 끌려간다)

신하들: (왕후전하가 계셔서 정말 다행이다)(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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